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티투스 라비에누스 (문단 편집) === 카이사르의 부관 시절 ===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와 같은 [[이탈리아]] 피케눔의 킨글룸 출신으로,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귀족이 아니라 [[에퀴테스|기사 계급]]에 속한 인물이다. 기원전 79년의 [[집정관]]인 [[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]]의 휘하에서 군 경력을 쌓았으며 카이킬리아의 해적 소탕 작전에도 참가했다. 기원전 63년에 라비에누스는 [[호민관]]으로 선출되었고 당시 [[폰티펙스 막시무스]]에 선출된 [[카이사르]]와도 깊은 친분을 쌓게 되었다. 기원전 60년 전후로는 [[법무관]]을 맡은 것으로 여겨진다. 카이사르는 [[갈리아 전쟁|갈리아 원정]]을 떠날 때 라비에누스를 [[레가투스]](부관)로 삼았고 이후 8년 동안 그의 밑에서 [[레기온|군단]]이나 [[기병대]]를 이끌며 눈부신 활약을 펼친다. 그는 [[갈리아 전쟁기]]에서 카이사르가 가장 높게 평가하는 인물로 소개되며, 카이사르가 배후를 맡길 정도로 신임하는 장군이었다. 사실상 카이사르에 이은 [[부사령관]] 역할을 맡았다. 애초에 카이사르 휘하 군단장 중 법무관급 경력을 가진 것은 라비에누스를 제외하면 [[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]] 정도밖에는 확인되지 않는다. 라비에누스는 9군단과 10군단을 지휘하여 [[사비스 전투]] 등에서 큰 공을 세웠는데 특히 [[루테티아 전투]]는 그가 없으면 패배했을지도 모를 만큼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. [[로마군]]의 전략, 특히 카이사르에게 있어서 기병대의 활용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고 따라서 기병대의 지휘관 자리는 웬만한 능력을 가지고서는 맡길 수 없는 중책이었다. 게다가 라비에누스는 독립적인 전투에서도 두각을 보여주는데 이는 그가 단순히 카이사르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 이상의 전략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. 군사적인 재능 외에도, 라비에누스는 피케눔의 부유한 [[원로원]] 의원이자 실력자로서 여겨졌으며 카이사르의 도움으로 상당한 부를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. [[키케로]]는 라비에누스가 부자가 된 것을 한탄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. 이 시점에서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충실한 부장이자 핵심 카이사르파로 여겨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